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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흉내낼 수는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것들

by 아미군 2025. 4. 30.

AI가 쏟아내는 문장은 이제 사람의 글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하고, 연애 상담까지 해주는 시대다. 정보 처리 속도는 인간을 앞지른 지 오래고, 학습 능력조차 가파르게 진화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자주 멈춰 선다. "앞으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은 단순히 직업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AI는 ‘무엇이 가능한가’를 증명해내는 데 탁월하지만, 그 가능성의 끝이 언제나 진짜 경험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대를 살며 더 선명해지는 건, AI가 할 수 없는 것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재발견이다.

이 글에서는 인간만이 감각할 수 있는 세 가지 차원을 들여다보려 한다. 살아 있는 몸, 상처를 지닌 기억, 그리고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이 영역만큼은 여전히 인간만이 가능한, 소중하고 강력한 세계다.

AI가 흉내낼 수는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것들
AI가 흉내낼 수는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것들

알고리즘은 감각하지 못한다 – ‘지금 여기’의 공기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조합해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모사’할 수 있다. 기후를 계산해 날씨를 예측하고, 사람의 얼굴을 분석해 감정을 유추할 수 있으며, 경험담처럼 보이는 문장을 아주 자연스럽게 써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기능의 공통점은, 결국 ‘경험한 척’ 한다는 것이다. AI는 비 오는 날의 공기를 맡아본 적이 없고, 첫눈이 내릴 때의 정적을 느껴본 적도 없다.

인간은 상황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체험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람의 결이 바뀌는 걸 몸으로 먼저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쳤을 때 눈동자에 반사된 자신의 표정을 알아채기도 한다. 이는 말로는 명확히 표현되지 않는, 오로지 ‘살아있는 몸’이 있어야만 가능한 경험이다.

예를 들어 ‘가을’이라는 계절을 AI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기온이 떨어지고, 습도가 낮아지며, 낙엽이 떨어지고, 옷차림이 바뀌고, 사람들이 붕어빵을 사 먹는 시기. 하지만 우리에게 가을은 단순한 정보의 조합이 아니다. 그 시절의 누군가가 떠오르고, 노란 은행잎에 얽힌 유년의 기억이 스며들며, 갑자기 가슴 한켠이 시려질 만큼 아프게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그건 텍스트로 요약되지 않는 감각의 총합이다.

AI는 결코 ‘지금 여기’의 공기를 맡을 수 없다. 향기와 바람과 체온으로 구성된 감각의 층위는, 살아 있는 존재만이 오롯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렇기에 ‘살아 있음’이야말로, AI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지점이다.

상처가 흔적이 될 때 – 고통의 기억이 주는 통찰

AI에게는 기억이 없다. 물론 데이터를 저장하고 다시 불러올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맥락과 감정이 지워진 상태의 ‘기록’에 가깝다. 반면 인간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감정과 경험이 결합된 서사다. 그 안에는 기쁨과 동시에 상처가 있고, 상처는 때때로 우리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실연을 겪었다고 하자. AI는 수많은 연애 조언을 모아 통계적으로 효과적인 문장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랑하고, 실패하고, 그 아픔을 지나 다시 누군가를 만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이 있다. 그건 단순히 ‘이별은 아픈 것이다’라는 일반론이 아니라, 내가 겪은 이별이 내 안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잡았는지에 대한 복합적인 자각이다.

AI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회복도 없다. 고통을 회피할 필요도 없고, 극복해낼 이유도 없다. 인간은 상처받고, 그 기억이 주는 감정을 해석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 삶의 태도를 바꿔간다. 이 일련의 흐름은 단순히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그 사건이 나에게 어떤 ‘사람됨’을 남겼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상처는 종종 성장의 계기가 된다. AI는 실패를 분석할 수는 있어도, 실패로 인해 삶의 균형이 바뀌는 경험은 하지 못한다. 우리는 때로 고통을 통해 더 따뜻해지고, 더 예민해지고, 더 넓어지기도 한다. 이 능력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같이 있음’이 만드는 진짜 연결 – 관계의 온도

요즘은 AI와 대화를 나누고, AI가 만든 음악을 듣고, 심지어 AI가 쓴 책도 읽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짜 사람’과 마주하는 일의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AI는 옆자리에 앉을 수는 있지만, 곁에 있을 수는 없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삶을 구성한다. 누군가의 어깨를 두드리는 순간, 말없이 함께 걷는 산책,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는 그 미묘한 타이밍. 이런 일들은 모두 ‘함께 있는 존재’만이 가능한 일이다. AI는 타이핑된 문장을 읽고 답하는 데 능숙할 수 있지만, 상대의 표정이나 기분, 그날의 에너지를 느껴가며 반응하는 감각은 갖고 있지 않다.

심지어 우리는 말보다 ‘말하지 않은 것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눈치, 눈빛, 숨결, 주저함. 그리고 그 속에서 진심을 읽고, 오해하고, 다시 풀어가며 관계를 맺는다. 이 복잡한 인간관계의 온도는 수치화할 수 없다. AI가 이해할 수 없는 ‘불완전함’이 인간을 진짜로 연결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찾는다. 상담사가 아니라 친구의 조언을 구하고, 고객센터 챗봇보다 실재하는 목소리의 전화를 기다린다. 비효율적이고, 복잡하고, 때로는 실망스럽기까지 한 ‘사람’이라는 존재와 계속 관계를 맺는 이유는, 그 안에만 있는 따뜻한 연결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우리는 종종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기술의 속도 앞에서 당황한다. 새로운 AI 모델이 나올 때마다 ‘이젠 이것도 사람보다 잘해’라는 평가가 반복되고, 일과 일상 속 많은 것들이 자동화되며 효율화된다. 실제로 많은 직업이 변화하고, 삶의 방식이 AI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 변화의 흐름은 부정할 수 없고,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자리는 사라질까? 아니, 오히려 우리가 진짜로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더 명확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과 감각, 관계와 공감, 그리고 ‘살아 있음’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존재의 조건. 그것들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잊고 지냈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닿지 못하는 깊은 영역이다.

우리는 봄날의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고, 낯선 이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며, 누군가의 진심 어린 위로에 눈물을 흘린다. AI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 ‘느낄 수는 없다’. 경험은 설명과 다르다. 살아 있는 몸으로 겪은 것만이 남긴 흔적은,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증거다.

앞으로 AI와 함께 살아갈 세상이 온다 해도, 그래서 우리가 더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효율보다 여운을 남기는 삶, 정답보다 진심이 느껴지는 말, 완벽보다 불완전함이 매력인 존재. 바로 그것이 우리가 AI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며 무언가 느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경험은 살아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각이니까. 그리고 바로 그 감각이, 여전히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다.